완벽한 서비스에는 침묵도 포함된다 | playlist

Video Description

생모리츠발 체르마트행 빙하 특급 902편. 엑설런스 클래스의 객차 안은 진공관처럼 고요했다. 창밖으로 흐르는 알프스의 설경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하얘서, 마치 누군가 세상의 채도를 강제로 낮춰버린 것 같았다. 나는 2A 좌석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경사 보정 와인 잔을 응시했다. 열차가 굽이친 선로를 돌 때마다 잔 속의 피노 누아는 붉은 혀처럼 찰랑거렸지만, 쏟아지지는 않았다. 중력과 원심력의 타협. 이 열차 안의 모든 것은 그 정교한 물리학적 균형 위에 존재했다. 단 한 사람, 내 앞자리 1A석의 여자를 제외하고. 그녀는 생모리츠에서 탑승한 순간부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챙이 좁은 검은색 클로슈 햇을 눌러쓰고,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였다. 컨시어지가 웰컴 샴페인을 따랐을 때도, 첫 번째 코스로 나온 송어 요리가 식어 비린내를 풍길 때까지도 그녀의 손은 무릎 위에서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나는 직업적인 습관으로 그녀를 관찰했다. 열차의 미세한 진동주파수(Hz)가 바닥을 타고 올라와 시트를 울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어깨는 그 진동을 흡수하지 못하고 목각 인형처럼 뻣뻣하게 떨리고 있었다. 살아있는 인간의 근육이 가진 탄성 계수가 "0"에 수렴하고 있었다. "손님, 식사가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컨시어지의 물음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코트 깃 위로, 기묘하게 달콤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고급 향수가 아니었다. 한여름 쓰레기장에 방치된 과일 껍질에서나 맡을 법한, 혹은 고산지대의 만년설이 녹을 때 번식한다는 '수박 눈(Watermelon Snow)'의 그 비릿하고 끈적한 단내였다. 영하 20도의 바깥세상과 완벽하게 차단된 이 23도의 객차 안에서, 그 냄새는 이질적인 균열처럼 느껴졌다. 열차가 필리주르를 지나 란트바서 고가교에 진입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높이 65미터의 아찔한 곡선 구간. 열차는 허공에 걸린 레일 위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태양의 각도가 낮아지며 객차 안으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창문은 순간적으로 투명함을 잃고 거울이 되었다. 그 짧은 3초의 찰나, 나는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눈을 뜨고 있었다. 하지만 동공은 터널의 어둠에 반응해 확장되지 않았다. 최신형 '누 글라스(Nu Glass)'의 미세한 레이저 패턴 위로 반사된 그녀의 피부는 왁스를 바른 듯 매끄럽고 창백했다. 살아있는 사람의 피부 밑에서 산란해야 할 붉은 혈색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유리창의 입자 그 자체를 응시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지독한 권태였거나, 혹은 이미 완료된 죽음이었다. 열차가 터널을 빠져나오자 다시 빛이 쏟아졌다. 나는 시선을 돌려 내 몫의 와인을 마셨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액체가 서늘했다. 그녀의 테이블 위, 손대지 않은 수프 그릇 위에는 이미 얇은 막이 형성되어 있었다. 엔트로피의 법칙은 잔인할 정도로 정직했다. 열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고, 질서는 무질서로 향한다. 그녀의 시간만이 그 흐름에서 이탈해 있었다. 안데르마트를 지나 오베랄프 패스를 오르기 시작하자, 열차는 톱니바퀴를 사용하는 랙 레일(Rack Rail) 방식으로 전환했다. 철컥, 웅- 하는 기계적 소음과 함께 둔탁한 진동이 객차를 지배했다. 살아있는 승객들은 무의식적으로 근육을 이완시켜 그 충격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1A석의 여자는 달랐다. 열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그녀의 상체는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튀어 올랐다. 경추와 척추가 하나의 단단한 막대기처럼 고정된 상태. 사후 경직(Rigor Mortis).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진행된, 돌이킬 수 없는 경직이었다. 10시간, 아니 그 이상. 누군가 이미 차갑게 식은 그녀를 여행 가방처럼 이 자리에 앉혀놓고 사라진 것이다. 그녀는 승객이 아니라, 470프랑짜리 좌석을 차지한 화물이었다. 해가 지고 '블루 아워'가 찾아왔다. 창밖은 푸른 잉크를 풀어놓은 듯 어두워졌고, 객실 안은 황금색 조명으로 채워졌다. 마침내 종착역인 체르마트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열차가 제동을 걸며 관성의 법칙이 작용했다. 쿵. 앞으로 쏠리는 힘을 이기지 못한 그녀의 상체가 무너져 내렸다. 이마가 테이블에 부딪혔고, 쓰고 있던 클로슈 햇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드러난 그녀의 뒷목에는 중력에 의해 혈액이 쏠려 생긴 보라색 시반이 멍 자국처럼 선명했다. 객차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러나 비명은 없었다. 컨시어지가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당황하지 않고 무전기에 짧은 암호를 속삭였다. 엑설런스 클래스의 서비스에는 '완벽한 침묵'도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챙겼다. 그녀의 테이블 위, 쏟아지지 않은 와인 잔 속에서 붉은 액체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흘리지 못한 피처럼 보였고, 바닥에 떨어진 붉은 젤리 조각들은 녹아내린 그녀의 내장처럼 보였다. 열차 문이 열리고 차가운 알프스의 공기가 폐부로 밀려들어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눈 덮인 플랫폼을 걸으며 빌 에반스의 를 흥얼거렸다. 등 뒤에서 객차의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 남겨진 그녀는, 비로소 그 지독한 진동과 시선에서 해방되어 완벽한 정물이 되었을 것이다.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수박 냄새는 나지 않았다. 다만 밤의 냉기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